우리가 보통 중생의 마음이라면 이 시군 이걸 대표로 얘기를 해요. 그래서 수상행식 4가지를 그냥 한 가지로 부를 때씩 이렇게 불러요. 왜냐면 수상행은 보조적이고 식은 중심이니까 식이 심 와, 마음의 왕이고 나머지 세계는 심소라고 해서 마음의 부수 작용이라고 이렇게 부르거든요. 그래서 이제 시고니 중요한데, 식이라는 말이 분별심이라는 말이에요. 근데 이 분별심 식이라는 말이 좀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세상을 볼 때 세상을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를 못하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자기식대로 해석해서 바라보죠.
불교의 식온
있는 그대로인데 우리끼리 해석해서 바라봐요. 즉, 비 오는 날을 어떤 사람은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안 좋아하죠. 근데 비 오는 날은 그냥 그런 거죠. 있는 그대로죠. 좋은 날도 아니고 나쁜 날도 아니에요. 비 오는 날이 좀 싫다고 해서 배운 날이 필요 없는 건 아니죠. 이 세상에 비가 안 오면 큰일 나죠. 비가 오는 날도 반드시 있어야 하고 햇볕이 내리는 날도 반드시 있어야 하는 거죠. 양변이 다 필요해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식대로 분별을 해서 있는 그대로인 비 오는 날을 어떤 사람은 좋아, 어떤 사람은 싫어. 이렇게 자기 식대로 해석해서 대상을 파악해서 아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마다 자기 식대로의 분별 인식이 있겠죠.
어떤 사람은 내 인식에 내 분별심 속에 이식이 쌓여 있느냐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이런 걸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저런 걸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보수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진보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어떤 사람을 보고 '아, 느끼해' 이러는데, 어떤 사람은 '어 나는 훈남인데' 이렇게 볼 수도 있겠죠. 자기 안에 어떤 식이 쌓였느냐에 따라 다른 거예요.
그 식은 어떻게 쌓이느냐 하면, 과거에 수많은 경험들을 통해서 어떤 경험들을 통해서 내가 비 오는 날 아주 기분 나쁜 일을 겪었어요. 비오는 날 막 비가 쳐 가지고 온몸에 이랬고 뭐 하여간 안 좋은 일이 많았어요. 그러면 그 트라우마, 그 경험 때문에 비 오는 날 하면 내 마음속에 뭔가 모르게 별로 안 좋은 이미지가 이렇게 취합되어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오늘 오취온이라고도 부르거든요. 오온이라고 하는 수상 행식이라는게 취해 가지고 내가 취한다는 거예요. 삶의 경험 속에서 나오는 수많은 어원들을 내가 취해 가지고 이걸 쌓아 놓는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쌓아 놓으니 오치온을 나라고 착각하는 게 허망한 우리들의 가짜 나를 진짜 나라고 착각하는 거거든요.
근데 온 가운데 최고가 시기잖아요 식, 무슨 말이냐면 10원이라는 것은 분별심이라고 부른다 그랬어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분별해서 본다. 이 말은 나눌 분자 구별할 별자 나누고 구별해서 본다는 거잖아요. 즉 대상을 보자마자 안식 눈으로 보는 식, 눈으로 보자마자 인식하잖아요. 인식해서 분별해서 보는 마음, 인식 안식이라 돼요. 눈으로 보자마자 이걸 딱 분별하는데, 요걸 보고 길다거나 짧다라고 해석해요. 우리는 그즉 이거는 원래 긴 거예요 짧은 거예요.
이것만 놓고 보면 있는 그대로지. 이걸 가지고 길다거나 짧다라고 할 수 없잖아요. 얘보다 더 긴게 오면, 얘는 짧아졌다가. 얘보다 더 짧은 귀여운 얘는 길잖아요. 즉 이걸 가지고 길다거나 짧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게 진실이죠. 그걸 무분별지라고 불러요. 분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그걸 정견이라고 불러요.
정견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지에 그걸 정견 무분별지 그걸 반야지혜라고 불러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안 보죠. 그렇게 안 보고 우리는 분별심으로 봐요. 이걸 어떻게 분별하느냐 나누어 버려요. 옆에 연기적으로 뭔가를 또 다른 걸 세워 버려요. 가지고 옆에 긴 게 오면, 얘는 짧은 거. 짧은 기업 얘는 긴 거 이래 가지고 얘를 인식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이거를 딱 보면 우리 머릿속에서 얘를 길다고 인식한 사람은 그냥 이걸 길다라고 집착해요. 이걸 짧다라고 인식했던 사람은 인연따라, 긴 거 옆에서 인식한 사람은 짧다. 이렇게 인식할 것이고. 인연 따라 이런 옆에서 인식한 사람은 길다라고 인식하겠죠.
일하는 사람은 길다. B라는 사람은 짧다라고 인식했는데 두 사람이 만났어요. 그럼 얘는 짧은데 사람이 길다고 자꾸 하니까 막 화가 나는게 막 싸운단 말이에요. 네가 맞냐 내가 맞냐. 이 분별심을 우리가 여태까지 살아온 삶의 경험 속에서 분별심을 이렇게 취해 가지고 치곤을 분별심을 취해서 내 안에 착 쌓아 놓고 있어요. 그래서 사람마다 내가 어떻게 분별하는지에 대한 데이터가 다 쌓여 있고요.
그리고 a라는 사람을 내가 좋거나 나쁘게 분별을 했어요. 그러면 이 과거 경험이 이렇게 쌓여 있잖아요. 그래서 쌓여 있는 것을 전혀 새로운 c라는 사람을 만났어요. 근데이 사람을 딱 보자마자 옛날에 내가 사귀었던 사기다. 내가 차였지만 사귀었던 그 사람하고 왠지 이미지가 비슷해요. 근데 내가 그 사람에 대한 왠지 좋은 기억이 있어요. 그러면 전혀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좋은 느낌이 일어날 수도 있겠죠.
그러니까, 겉으로 봤을 땐 누가 봐도 그 사람 판단할 수 없어요. 처음 본 사람이고 성격 좋은 줄도 알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첫눈에 반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게 왜 그럴까요? 쌓아왔든 취해왔던 시온이 증장돼 있는 그걸 개입시켜 가지고 그 사람을 재해석한 거예요.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본 게 아니라 과거의 기억과 경험과 수많은 사람과 비교 분별해 가지고 이 사람은 이럴 거야라고 해석한 거예요.
주로 우리가 연예인들 좋아하면서 연예인들 따라다니는 팬클럽하고 그럴 때 보면 혹은 뭐 특정한 작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막 엄청 좋아하다가 작가를 좋아하거나 연예인을 좋아하면 거기서 그 지랄이잖아요. 직접 만나지 마라 직접 만나면 실망한다. 왜 실망할까요?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본 게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한 내가 만들어 놓은 이미지 모양 상을 가지고 내가 느낌을 가지고 내가 행위를 가지고 내가 의식을 가지고 쌓아 놓은 거 내 식대로 제멋대로 해석해 놓은 그 사람을 내가 내 안에서 쥐고 있던 거에 표상을 가지고 그걸 그 사람에게 맞춰보니까 그것과 맞은 사람이 있을까요? 내 생각으로 가지고 그 사람을 좋다고 했는데 그 사람이 내 식대로 되겠어요? 안 돼요. 그러면 자기 마음속에 내가 만들어 놓은 그 사람을 좋아해 놓고 실제 그 사람을 좋아한 게 아니에요.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이 사람을 좋아해 놓고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우린 착각하는 거예요.
자기 분별의 오류
이와 같이 우리는 세상을 자기 식대로만 해석해서 바라봐요. 그러다 보니까 이 분별심으로 바라본 세상, 그러니까요, 이제 우리는 세상을 처음 보는 것도 분별할 수 있는 데이터가 내 안에는 싹 모여 있죠. 그러니까 어떤 걸 처음 보는 거라고 할지라도 보자마자 내 식대로 해석할 수 있죠. 우리는 다 처음 보는 사람도 자기 식대로 해석하잖아요. 처음 하는 일인데 이걸 과거에 해봤던 경험을 이것저것 짜 맞춰 가지고 대충 해내기도 하잖아요. 이러한 어떤 능력들이 있단 말이죠.
이런 걸 보니까 이걸 이제 나중에 부파 불교나 대승 불교, 유식 불교 같은데 오면 이런 걸 가만히 관찰해 보니까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식이라는 게 놀라운 거예요. 시계 증장, 과거 경험에 따라서 내가 분별해서 쌓아놓은 의식들이 쫙 모여있던 어딘가 어딘지 모르겠지만 어딘가 뭐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여기에 빗대어서 이걸 끄집어내 가지고 처음 보는 걸 이 거로 걸러서 해석해서 그걸 분별하는 거예요. 그죠, 그러니까 이것이 식이 쌓여 있는 곳이다 그래서 이 업식이라고 불러요.
이 의식을 가지고 이 의식을 기반으로 '저 사람 좋은 사람 같아'라고 분별했으면 그 분별을 기반으로 행운 행동에 옮기잖아요. 행운이 행동에 옮기는 거예요. 의식이라는 왕이 수온과 상온이라고 하는 느낌과 표상작용이라고 하는 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분별을 해요. 분별을 하고 나서 '아이 사람 좋은 사람이야' 하면 자기 행동 대장 행운을 가지고 보내 가지고 행동하게 만들어요. 식을 가지고 이제 행위에 옮긴다.
이렇게 업식이라고 불러요. 이렇게 행동이 옮길 때 보니까 업식이 축적되어진 것이 내 안에 어딘가 쌓여 있는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이것이 업식이식이 내 안에 어딘가에 쌓여 있을 거야라는 상상을 한 거예요. 그래가지고 이 업장, 업식이라는 것이 내 안에 시기 증장되어서 쌓여 있는 공간을 장식이라고 이름 불렀어요. 법화불교나 유식 불교에서 장식 함장 되어 있는 의식이다 곳간이다 저장 창고다 이렇게 부른 거예요. 그걸 유식불교에서는 아뢰야식이라고 불렀어요.
아래아 식이라는 말 들어보셨죠. 불교 처음 들으신 사람은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주식 불교에서는 아래야식이라고 해서 내 안에 업식들 이식이 저장되어 있는 축적된 공간이 있다 이렇게 믿은 거죠. 가상의 어떤 식을 만들어 낸 거예요. 그래서 우리 표상의 의식 분별심, 그걸 육식이라고 불렀고요. 그 밑에 더 심층 깊은 곳에 아뢰하시기라는 걸 만들어 놓은 거예요.
그러나, 이 아래아식 속의식이 쌓여 있잖아요. 그래서 내가 이 사람, 난생처음 보는데 옛날에 봤던 누구랑 비슷해라고 느끼면 '야, 너 같은 사람 내가 모를 줄 알아 다 경험해 봐서 알아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왱이 식에서 끄집어내 가지고 그 사람을 해석했으니까. 그러니까 즉, 이 식 속에 있는 내 마음에 무의식 같은 이 쌓여 있는 이 마음을 보고서는 이게 난 줄 아는 거예요. 이게 나의 내 마음의 진실인 줄 아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내 마음, 내 분별, 내 인식이라는 게 여기 딱 쌓여 있다 이렇게 여기니까 그럴 법하잖아요. 왜냐면 내 성격, 내 개성, 나라는 게 있어 내 마음이 있어라고 느끼잖아요. 현실에서 그 왜 그렇게 느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