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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중요성과 분별심에 대한 이해 2편

나는 나의 개성이 있잖아요. 나는 이런 걸 보면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있잖아요. 저런 걸 보면 싫어하는 사람이 내가 있잖아요. 그게 어디서 나왔어요? 이 음식에서 나왔잖아요. 아리아식에서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아리아식을 쌓여 있는 패턴이 있겠죠? 그죠 의식이 있겠죠. 나는 이런 스타일은 좋아해, 저런 스타일은 싫어해. 이런 나름의 분별의 패턴이 있단 말이야. 이 패턴이 쌓여 있는 걸 보고 나라고 착각하는 거예요.

 

유식불교 

그래서 유식 불교에서는 이 아래아 식을 보고 나라고 착각하는 아집. 그걸 재치를 말라 시기라고 불러요. 그래서 초기불교에서는 분별심 이래 가지고 식 이래서 분별심. 이렇게 얘기를 했는데 이걸 부파불교나 60불과에 가면 더 심층적으로 연구를 해 가지고 그 연구 결과로 식은 60만 있는 게 아니다. 7씩 말라식이라고 하는 자아 집착식이 있고 또 8 식이라고 하는 음식이 저장되어 있는 창고가 있다.

 

이렇게까지 이제 연구한 거죠 상상력을 펼친 거죠. 어찌 보면 그렇게 해서 이제 유식불교라는 게 있기도 해요 근데 그게 그럴 법 하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그럴 법해서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거예요. 이처럼 식은 식은 그냥이 모든 걸 합쳐 가지고 시기에 분별심이에요. 그리고 이렇게 의식이 일어나면 우리는 분별하는 내가 여기 안에 있다고 생각해요. 여러분이 나는 불교를 좋아하는 사람이야, 나는 내성적인 사람이야, 나는 뭐 이런 걸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야, 나는 뭐 나쁜 성격, 나쁜 사람들은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이야, 나는 거짓말하는 사람은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런 자기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있다고 느끼고 그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어떤 분별한 그 마음을 그걸 나라고 여기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사람마다 분별심을 다 다르겠죠 그러니까. 사람들마다 다 자기 개성이 다 다르다고 느끼죠. 이식이 다 다르니까, 식이 다 다른 자기 개성이라는 자기가 따로 있다고 착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자기가 동일시 하는 거예요. 그 마음을 자기와 동일시 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사실인가요? 그 식 분별심이 내가 맞나요, 분별하는 내가 여기 안에 어디 숨어 있나요? 이 아리아식이라는 것도 수많은 과거 경험들이 식으로 쌓여 있는 거잖아. 인연 따라 쌓여 있던 거잖아요. 그런데 시기 바뀌면 경험이 바뀌면 식도 바뀌지 않을까요? 이렇게 우리는 시기 계속 바뀌어요, 분별심이 계속 바뀌어요.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던 사람이 따르게 생각하는 사람으로 바뀔 수도 있고. 그러면 이게 납니까? 저게 납니까? 어떤 하나만 나라고 고정되게 집착할 수 있는 말이죠. 없습니다. 이 아래아식이 됐든 자기 분별심이 됐든. 이 분별심은 평생에 걸쳐서 계속해서 변화하지요. 그럼 이 분별심이 여기 쌓여 있는 걸 아래아식 속에 쌓여 있다고 했는데 쌓여 있는 분별심의 종류를 하나하나 종자라고 불렀어요.

 

정자 요식 불교에서는 왜 종자라고 불렀냐면 내 성격 좋은 종자가 이렇게 쌓여 있으면 나중에 그게 꼽히잖아요. 현실에서 좋은 일로 꼽히잖아요. 나쁜 종자가 많이 있는 사람은 나쁜 일로 꼽히잖아요. 결과가 맺어지잖아요. 그래서 종자라고 불렀거든요. 근데 이 종자가 우리는 좋은 종자만 있는게 아니라 나쁜 종자도 있겠죠. 그럼 이제 업식의 종자가 아래아 식 속 이렇게 들어 있어요. 근데 나쁜 종자를 마이너스 1로 이름 붙여 봐요.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종자 업식 가운데 좋은 종자를 플러스 1로 이름 붙였어요.

 

그러면 내가 처음에 이 세상에 왔을 때 혹은 이렇게. 살면서 20대 때 내 업은 플러스 1, 2, 3, 마이너스 1, 2, 3란 업이 있어요. 그러니까 선과 악이 비슷하게 있어요. 근데이 사람이 살다 보니까 마음공부를 배웠어요.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고 너무 착하게 삶을 살기 시작해요. 그래서 복을 막 짓기 시작해요.

 

그래서 플러스 4, 5, 6, 7, 8, 9, 10까지 복을 막 짓는 삶을 살았어요. 그리고 악업을 참회하고 기도하고 하면서 마이너스인 -3이었던 악업을 다 참회하면서 말끔히 비우고 있어요. 그리고 옛날에 나쁘게 했던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더 잘해주고 하는 걸 통해서 마이너스 업장을 많이 비웠어요.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그 과거 없이 다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123이라는 업장은 없어졌지만 마이너스 4, 5 정도의 악업은 또 지었어요. 그리고 좋은 플러스 1, 2, 3라는 좋은 업식을 가지고 있던 것을 내가 남들에게 복을 나눠주고 베풀고 이런 걸 통해서 이것도 다 복을 받아서 써먹었어요. 1, 2, 3를 그럼이 사람에게 남은 업은 플러스 4, 5, 6, 7, 8, 9, 10 하고 마이너스 4, 5가 있잖아요.

 

아까는 플러스 1, 2, 3, 마이너스 1, 2, 3가 있었는데 같은 사람이 다른 사람이에요. 업보는 있는데 작자가 없죠. 이 사람과 이 사람이 업이 전혀 달라졌잖아요. 업이 완전 달라질 수 있잖아요. 이렇게 그죠. 이와 같이 우리는 업이 인연 따라 조건에 따라 모이고 흩어지고 모이고 흩어지는 거야. 좋은 업도 모였다 흩어졌다. 나쁜 업도 모였다 흩어졌다.

 

자아정체성의 변화

그러면 자기가 변해가는 거죠. 성격도 변하고 개성도 변하고 외모도 변해요. 계속 변해 가잖아요. 어떤 한 지점에 있던 어떤 나이대에 있던 특정한 시기가 나의 전부라고 할 수 없어요. 나는 계속 변해가는 과정. 중에 하나예요. 고정된 자아라는 게 없어요. 업식이 모여 있는 걸 보고 이 업식이 모여 있다 보니까 내가 비슷한 패턴으로 반응할 거 아니에요. 왜 내 업식이 여기에 이렇게 쌓여 있으니까 이 업식 가지고 반응하잖아요. 그러니까 업이 펼쳐질 때 어떤 상황을 만날 때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뭔가 상황을 마주할 때 사람들은 대부분 패턴이 읽히죠.

 

착한 사람은 저 사람 어떻게 할게 뻔히 보이잖아요. 그런 사람 있잖아요. 왜 그 사람 업이 보이니까. 그 사람 원래 착한 사람이니까 그런 일 있으면 착하게 행동할 거야가 보여요. 나쁜 사람도 뻔히 나쁘게 행동할 거야 보이고. 왜 보일까요. 업식이 자기인 줄 아는 거예요. 업식이 이렇게 훤히 드러나 있단 말이죠.

 

그런데 그게 100%는 아니에요 바뀔 수도 있어요. 이처럼 우리는 이렇게 업식이 자기의 이렇게 딱 쌓여 있고 그 쌓여 있는 패턴들을 자기라고 동일시 하는 거야. 내가 착한 일을 계속해 왔으니까 나는 착한 사람 하는 자기 개성이라는 동일시 나는 착한 사람이야를 자기와 동일시해요.

 

어떤 사람은 내가 죽으면 죽었지. 내 자식은 절대 죽으면 안 돼. 오히려 내 자식을 더 나아보다 나보다 더 나와 동일시예요. 내가 만든 동일시지요. 스님 원래 부문 다 그래요. 아니에요. 제가 많은 분들을 봐서 알아요. 부모는 무조건 자식을 다 사랑해요 하잖아요. 달라요 그 사랑의 깊이가 달라요. 부모마다 어떤 부모는 사랑은 하겠지만 그래도 별로 안 사랑하는 부모도 있고요. 심지어 어떤 부모는 자식을 미워하는 법문도 있고요.

 

심지어 자식을 피해 도망 다니고 싶은 부모도 있고요. 자식에게 너무너무 당해 가지고 자식을 철천지 원수처럼 생각하는 부모도 있고요. 심지어 법적으로 싸우는 부모. 자식 지간도 있고요. 옛날에 임금들 어때요? 죽이는 부모가 자식 주의 자의식의 부모 죽이고, 임금 자리에 올라가는 사람들도 있어요. 무조건 그렇지 않아요. 자기 분별이에요. '내가 내 자식이야'라고 하면 그때부터 자식이라는 애착이 생기는 거지.

 

원래 있던 게 아니에요. 그 갓난 아기 때 그 아기를 낳는데 병원에서 자식이 바뀌었어요. 근데 나는 내 자식인 줄 알고 키웠어요. 그러면 그 아기가 내 자식 아니에요. '내 자식이라는' 사랑이 붙잖아요, 그죠. 그건 100% 내 자식이라고 믿고 키운 거 아니에요, 그죠. 진실이 아닌데 보세요. 진실 아니라도 내가 마음으로 믿으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입양을 했어도, 그 입양한 자식 키운 부모님들 얘기 들어보면 입양한 자식이라고 해서 '내 자식이 아닌 거' 같을까요? 아니래요. 정말 '내 자식이래요'. 진짜 마음으로 나왔으면 '내 자식인 거예요', 왜 세상은 물질세계가 아니에요.

 

'만법 유식'이라는 말이 있어요. 제가 식을 지금 얘기하고 있잖아요. '만법'이란 건 뭐냐면 이 세상 온 천지 척 온 우주 전체 만법은 '유식' 오로지 시기 만든다는 거예요. '만법 유식', 만법은 오 로직 '시기를 뿐'이란 말이에요.

 

여러분 세상이 진짜 있는 거 같잖아요. 여러분이 여기 있고, 세상은 진짜 있다고 느끼잖아요. 세상 진짜 있을까요? 세상은 자기가 인식할 때만 등장할 뿐이에요. 내 인식에 의해서만 세상에 등장해요.

 

자아형성

만약에 옛날 사람들이 강원도 오지에서 태어나 가지고 평생을 그 마을을 벗어난 적이 없어요. 정보도 접한 적이 없고. 옛날 사람이 그렇게 그 마을에만 살다가 죽었어요. 그 사람에게 우주는 뭘까요? 그 산속에 그 풀과 나무와 그게 전부예요. 그 마을 사람이 전부고. 지구 반대편이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 할 거예요. 오지의 원주민들은 지금도 그러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행기도 없고 지구 반대편에 이런 전쟁도 없어요. 그 사람에겐 기하도 없고 공포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 사람에겐 자기가 인식된 것만 있는 거죠. 그죠, 근데 그 사람이 이제 그 마을을 떠나서 세계 여행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비로소 그 사람에게 인식된 눈으로 봐서, 인식된 소리로 들어서, 인식된 냄새 맡아서, 인식된 맛봐서, 인식된 감촉 느껴서, 인식된 생각으로 인식한 의식, 이런 여러 가지 의식들이 분별심들이 분별심이 6가지에요. 그래서 안입이 서신의 색상의 위축법을 접촉할 때마다 의식이 일어난단 말이에요.

 

그 분별한 의식들이 이제 시계 증장이 막 일어나겠죠. 해외여행을 하면서 많은 걸 배우게 되면, 그러면 그 사람의 시기 증장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이제 이 세상 전부가 실제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 사람 머릿속에 분별심 속에서는 이제 비로소 세상이 등장한 거죠. 근데 그래봐야 그 사람이 본 세 개밖에 없잖아요, 우주 안드로메다는 못 봤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 세계가 있다라고 인식한 사람이 있어요. 근데 그 사람이 이렇게 명상을 배웠어요. 명상을 배워서 고요히 생각을 내려놓고 분별을 내려놓고, 명상은 지관을 명상이라고 해요. 지관, 분별심을 멈추고 씩 지금 말한 식 분별심을 멈추고 있는 그대로 보는 걸 명상이라고 해요. 수행이라고 하고, 수행을 하면서 이렇게 생각을 멈추고, 분별을 멈추고 그냥 보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