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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중도 수행방법 1편

도성제는 괴로움의 소멸을 통한 진정한 불교 수행의 실천에 대한 진리를 말해요. 즉, 불교의 목적은 괴로움을 없애는 것이죠. 우리가 하는 게 반이고, 탈이에요. 그러면 이 방법론, 어떻게 해야 우리가 괴로움을 소멸할 수 있고, 완전한 괴로움이 없는 삶을 살 수 있나요? 그 방법이 뭐냐 이거죠. 그 해탈, 열반으로 가는 길이 뭐냐 이걸 얘기하는 거예요.

 

도성제와 중도

근데, 이 도성제 해탈에 이르는 길을 설명할 때, 불교에서는 이제 중도로 설명을 하는데요, 중도라고 하고 이걸 구체적으로 이제 나눈 것을 정도라고 해요. 그래서 중도라고 얘기를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이미 2500년 전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거잖아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중도, 중도가 이렇게 뭔가 확 와닿지가 않는 면이 있어요. 여러분, 팔배 하는 방법 아세요? 하면 알아요. 아는 사람 알고, 모르는 사람 모르고. 한 5분 가르쳐 주면 바로 할 줄 알죠. 그죠, 염불 하는 방법 알아요? 방법 가르쳐 주면 알죠. 그 특정한 방법이 있으니까 정해진 길이 있으니까, 그걸 설명해 주면 안단 말이에요.

 

근데 이제 중도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렇게 뭔가 선명하게 확 와닿는, 어떤 수행법 같은 이미지로 그려지는 그림이 잘 없단 말이에요. 그니까 절, 염불, 독경 다 할 줄 아는데, 중도를 할 줄 아느냐 물어보면 중도를 내가 할 줄 아는데 모르나 이게 설명하기도 어려워하고 그렇단 말이야. 이게 진짜 중도라 그래요.

 

이게 머릿속에 이미지로 그림이 그려지면 그건. 중도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중도는 이거야, 이거 갈고 닦으면 그게 방법이야. 이것만 열심히 하면 해탈 열반을 얻을 수 있어. 이렇게 설명할 수 있는 어떤 선명하게 그림 그려지는 뭔가, 딱 논리적으로 딱 떨어지는 어떤 방법론이 정해져 있다면, 그거는 도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분별이 여기서 저기로 가는 방법 여기가 있고 저기가 있고 가는 길이 있잖아요. 그 셋으로 쪼개지 아아 그깐 이거 분별하는 거거든요. 근데 중도라는 것은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분별이라는 깨 주는 게 중도란 말이에요. 분별하지 않으면 된다는 거거든요.

 

그럼 이제 그걸 왜 정도라고 했는지를 보면 집성제에서 괴로움의 원인이 이제 연기를 통해서 12두 가지의 괴로움의 원인을 설명을 했어요. 그래서 또 멸성제 그래는 괴로움의 연인인 원인인 12가지 지분 가운데 어떤 하나를 멸하면 그다음이 멸하고 그다음이 멸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늙고 병들고 죽는 것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있다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우리는 연기가 어떤 뭐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어떤 업보의 또는 윤회의 어떤 원리라고 생각을 했는데, 12연기는 전부 다 멸하는 거라고 했잖아요. 그 즉, 가만 보니까 연기가 전부 다 분별이 있고 생각이었고 망상이 있다는 거죠. 전부 다 한 생각 사대에 일으킨 분들 망상이 연기입니다.

 

그래서 12연기를 멸하는 게 멸성제. 연기를 멸한다는 것은 곧 분별을 멸한다는 거예요. 무명, 무명이라는 건 박지 못한 마음이잖아요. 이게 이 시기 지분이 전부 다 자기 마음을 얘기를 하는 거거든요. 박지 못한 어두운 마음 어리석은 마음 그 마음을 멸해야 되는 거죠. 어리석은 게 뭐가 어리석은 마음이에요. 분별하는 게 어리석은 마음이야. 돌려 쪼개고 나누어서 분별하는 게 어리석은 마음이란 말이죠.

 

분별과 실제 행동

문명이라는 것도 분별을 얘기를 하죠. 행, 어리석은 생을 하니까 그 생각을 실제라고 여기면서 실제라고 여기는 행동을 한단 말이야. 유의 조작하는 행동을 한단 말이야. 그래서 이게 분별은 줄 모르고 실제라고 여기니까 어떤 하나를 막 실제로 가져야 된다고 생각하고 이런 어떤 그 실제라고 여기는 행동을 한단 말이죠.

 

그래서 이거를 이게 내가 하는 모든 행위의 원동력이 되는 어떤 행운이라는 게 실제가 아니다. 공한 것이다. 그래서 그 또한 어떤 분별이다 하는 거죠. 그래서 하되 함의 없이 한다. 이렇게 하되 하는 바 없이 한다.

 

즉, 유의 조작하지 않고 무위로 행한다. 그러면 했지만 거기에 내가 과도하게 실체성을 부여하는 행위가 없어지는 거죠. 그리고 또 이제 식이라는 것도 분별심을 얘기하죠. 식이라는 게 대표적으로 분별심을 얘기를 하고 또 명색이 건 내가 식의 대상 분별의 대상 내가 분별해서 생각으로 아는 모든 것들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명색, 이름과 모양으로 나누어서 인식한다 말이죠.

 

내 바깥에 대상을 이름과 모양을 써서 분별하는 거 그래서 명색은 바깥에 있는 이름과 모양 있는 실질적 대상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 대상을 내가, 내가 의미 부여했잖아요. 내가 이름을 부여했죠요. 내가 이런 모양에다 이런 이름을 부여하는 작용을 여기서 했단 말이죠. 자기 분별 의식을 얘기한다.

 

그래서 이 바깥 대상이 아니란 말이죠. 또 유입이라는 것도 내 눈 기코 몸 뜻이라고 하는 내 감각 기관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이 눈으로 보는 걸 보고 아이, 눈이라는 게 내 눈이네, 내 네, 나네. 여기 내가 있네 듣는 게 나네 눈 깊고 몸 뜻을 보고서는 그걸 나라고 여기는 허망한 착각, 허망한 망상. 그걸 이제 입이라고 하거든요.

 

그니까 육도 허망한 상이죠 나다 하는 망상이 입이고 바깥에 세상이다 하는 망상이 명색이. 내가 안다, 내가 세상을 봐서 뭔가 알았다 몰랐다 하는 게 식이란 말이죠. 그리고 과육이 명색, 접촉할 때 촉한 해요. 접촉하는 것도 실질적인 그 접촉 자체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우리는 보자마자 뭔가가 이렇게 봤으니까 뭔가가 있는 거 아니야. 들었으니까 들은 뭔가가 있는 거 아니야. 한 어떤 있다는 어떤 망상을 일으킨다 말이죠. 그걸 촉이라고 촉 입처 아고 부른다고 했어요. 그리고 이 촉에 따라서 수 느낌이 일어나요.

 

느낌도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거죠. 자기 안에 이 무명 행식, 즉 어리석음 때문에 어떤 행위가 있었고, 거기에 따라 어떤 인식 작용이 있었느냐에 따라서. 즉, 무명 행식 명색 유입 초기, 라는 분별 인식이 어떻게 나에게 식이 쌓여 있느냐에 따라서 분별이 쌓여 있느냐에 따라서 느낌이 달라요.

 

동일한 걸 보고도 어떤 사람은 좋은 느낌, 어떤 사람은 싫은 느낌. 그것도 자기에게서 나오는 느낌이죠. 자기 분별이 그 느낌이, 그 느낌도 결국엔 분별 심입니다. 그 느낌이 나아가서 애욕이 되거든요. 애욕과 집착이 되는데, 그것도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별. 작용이 분별과 취사 간으로 이어지는 분별이 말이죠.

 

분별한 것을 실제라고 여겨서 그걸 내가 애착하고 내 걸로 만들어야 되겠다라는 망상. 그게 자기 마음에서 일어난 분별이 말이에, 그걸로 인해 또 다른 내가 가지고 싶은 취하고 싶은 대상을 내 걸로 만들려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걸 통해 업으로 일으킨 말이죠.

 

망상 이해

그걸 유라고 하고, 그럼에 따라서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실제한다라는 생겨났다고 하는 그런 망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니까 생이라는 게 우리가 태어난 걸 생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그걸 그것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포함해서 여기서 생 일어난다는 거죠.

 

지금 눈앞에서 목전에서 우리가 그렇게 모든 것들을 실제와 인연 따라 인연 가압으로 잠시 왔다 가는 줄 모르고 실제라고 여기는 이런 망상 착각에서 생이라는 것이 일어나고, 생이 실제라고 여기면 노병도 실제라는 망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생을 없애고, 그럼 태어난 사람 다 죽이라는 게 아니거든요.

 

노병을 없애는 게 아니라, 생노병사 아는 게 내 한 생각에 불과했던 거수나 자기 망상에 불과했던 것 나라는 걸 깨닫는 거라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즉 괴로움의 원인을 12가지 지분으로 12 연기를 통해서 살펴봤더니, 괴로움의 원인이 전부 다 자기 망상, 자기 분별 다 생각이었다는 거예요.

 

일체가 별일 뿐이구나 사실을 내가 태어났다 늙는다 병든다 죽는다 내가 괴롭다 다 생각이에요. 한 생각 일으키니 괴롭거나 보면 그런 여러분들 느낌들이 있을 거예요. 어떤 한 가지 문제 때문에 괴로웠는데, 문득 어 아무것도 아니네 하고 한 생각 돌이키는 걸 통해서 이게 확 시원해지는 경우가 있어요.

 

예를 들어 어 어떤 목표가 있었어요, 나는 이걸 반드시 달성해야만 해 하는 목표가 있었는데, 그 목표가 내 인생에 제일 중요한 거라고 여기면서 막 집착해 가지고 그걸 향해 달려가고 그게 안 되면 어쩌나 두렵고, 그게 안 될까 봐 막 두려움에 떨면서 근신 걱정하고 이러다가,

 

문득 내 자식을 왜이왱이 대학에 보내야 된다는 거를 누가 만들지, 내가 만든 거 아니야 뭐, 그 가도 되고 안 가도 되지, 내 남편이 진급을 해야 된다 이거 우리가 만든 생각 아니야 어떻게 모든 사람이 다 할 수 있어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지, 왱이 회사만 다녀야 돼 여기서 그만두면 딴 데로 갈 수도 있네, 거지 알 수 없잖아.

 

인생은 이렇게, 문득 아, 내가 거기 너무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었구나를 깨닫는 순간, 이게 되게 가벼워져요. 또 어떤 사람이 나를 막 미워하고 헐뜯고, 뒤에서 막 그 험담하고 이러고 다녀 가지고, 그 사람에 대한 아주 분노가 이었다고 보잖 말이죠.

 

그래서 내가 딴 사람은 다, 저도 저놈한테 내가 이겨야 되겠다. 저 사람은 내가 질 수 없다 하는 분노 때문에, 그 사람에 대한 아주 막 원망과 분노 때문에, 그게 삶의 원동력이 돼 가지고, 내가 저놈한테 이겨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막 열심히, 저놈을 제치고 내가 지급해야 되겠다, 이런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잖아요.

 

근데 그런 마음이 있는 동안은, 그 사람이 나보다 더 잘할 때 되게 마음의 상처가 되고, 그 사람과 비교하면서 계속 스트레스 받고, 그 사람이 승승 장고 할 때마다 막 그냥 너무 괴로워지고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고, 이래서 막 침체된다 말이죠. 사람이 자존감이 뚝 떨어진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러다가, 문득, 어 저 사람과 내가 경쟁자라고, 한 그 비교, 그 마음, 누가 만들었지. 내가 만든 거잖아, 왜 저 사람이 나랑 경쟁자 해야 되지. 이 세상에는 80억 인구가 있는데, 그중에 한 명을 내가 딱 잡아서, 저 사람이 나랑 경쟁자, 이렇게 말한 것도 나잖아요. 내가 만들었으니까, 그걸 내려놓는 것도 내가 할 수 있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