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걸 붙잡았기 때문에, 그 괴로움이 나에게 생긴 거죠. 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 나를 했으니까 내가 이러지요. 하지만 세상에 나를 욕하는 사람이 없어야 됐다는 것도, 자기 망상이, 왜 없어야 되죠. 부처님도 요구도 먹고, 사셨 말이에요. 외도한 외도이유, 자기까지 보내기도 했잖아요.
교리적 깨달음
부처님 제자가 그러기도 했고. 부처님도 못한 걸. 내가 한다는 게 말이 된다는 말이에요. 내가 내 입도 내 맘대로 안 되잖아요. 내가 남들 험담하기 싫은데, 나도 모르게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하다 보면 안 좋은 말하고 괜히 찜찜하다 말이에요. 내 입도 내가 통제할 수 없는데, 남들이 나를 욕하는 걸 통제하겠다는 게 망상이 아니에요. 그 불가능한 환상이에요.
근데 문제는 뭐냐면, 남들이 나를 욕하는 게 그게 문제가 아니었던 거예요. 약간 우리가 생각했을 때, 저 사람은 약간 문제가 있어 정신 이상이 있어, 내지는 저 사람은 뭔가 좀 이상한 사람이야라고 이렇게 아예 탁 제껴 때, 그 사람이 나를 욕해도 별로 기분 나쁘지 않거든요. 욕한다고 해서 무조건 괴로운 게 아니에요. 내가 그것을 받을 때 괴로운 거예요.
근데 이에 대해서 부처님은 상대방이 나를 죽이려고 독을 탄 음식을 진수성찬으로 막 잔뜩 차려 놨을 때, 그 사람이 나를 초대해서 독개 도이탄 음식을 먹으라고 했는데, 내가 초대받아가 놓고 '아저 안 먹겠습니다' 하고 돌아가 버리면, 이 음식 만든다고 수고한 건 고통 고생스러운 건 다 그 사람 아니냐. 그 사람이 다 처리해 될 거지, 내야 내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그 사람이 나에게 욕한 것 때문에, 내가 그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것도 내 마음이죠.
내 마음 내가 그 의미 부여한 거죠. 이런 몇 가지 비유를 들었지만, 인생에서 내가 괴로워 한 모든 것들이 이러한 거요. 내가 살다가 만들어 놓은 거잖아요. 아, 내 자식이 처음 태어났을 때, 공부 잘할 줄 알았어요. 근데 살다보니 공부를 잘하면 갑자기 욕심이 말에요. 내가 부자 될 줄 알았어요.
예를 들면 어릴 때 가난했는데, 부자될 줄 몰랐는데 살다 보니까 부자도 되고 돈도 벌고 집도 사고 차도 사고 막 이러면 거기서 더. 욕심이 생긴다는 말이에요. 이것처럼 살다가 인연에 따라 조건에 따라 자기가 욕심을 어느 순간 그냥 진 거예요. 근데 이게 실체가 있어서 진 것이 아니에요. 인연에 따라 그냥 살아가다 보니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본래로 돌아가면 말이에요, 아무 일 없었든 아무것도 모르든 누구와 비교할 것도 없고 경쟁할 것도 없고 마음속에 분별 일으킬 것도 없던 것. 그걸로 돌아간다면 아예 한 생각뿐이죠, 한 생각으로 내가 만든 것뿐이죠. 그니까 그 사실을 자각하게 되면, 문득 내려놓을 수 있겠죠. 아, 이거 분별 분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면 그 모든 엄청난 일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일이 아니에요. 그 일들이 다 버려집니다. 이제 이것과 비슷하게 연기라고 말씀했던 12가지 괴로움의 원인들, 이것들이 전부 다 분별이 있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이것을 허망한 분별 망상인 줄 알면 거기 끌려가지 않는 거든요.
그래서 분별에 항상 허망한 분별, 이런 식으로 허망하다고 말을 하거든요. 왜 허망하냐면 인연에 따라 생겼다가 인연에 따라 사라지는 거니까. 이 소리가 인연에 따라 이렇게 생겼다가 사라지듯이 찾을 수 있나요? 지금 조금 전에 지나간 그 소리를 지금 찾을 수 없어요.
근데 우리는 조금 전에 지나간 그 소리에 집착하지 않잖아요? 그죠. 아무 문제가 없어요. 이게 있었지만 있었던 게 아니에요. 여러분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죠. 분명히 있었는데 있는 게 아니에요. 이것이 여러분을 괴롭히나요? 이미 지나간 거일 데가 괴롭힐 게 뭐 있어? 지금 없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는데 어떻게 나를 괴롭힐 수 있겠어요?
강박과 결핍
그런데 이걸 분별 망상으로 붙잡으면 실제라고 여기면 이미 떠나간 지금의 공해가 이미 사라졌어요. 없어요. 그런데도 이걸로는 괴로워할 수 있죠. 우리는 층간소음 때문에 괴로워한 사람이 그런 거잖아요. 어젯밤에 막 그 윗집에서 막 꼭, 어젯밤에 이미 이러고 지나갔다 말이에요. 오늘 난 출근했어요. 그 어젯밤에 이이예요.
근데 그 소리를 지금까지 붙잡고 심지어 어떻게 붙잡아요. 붙잡으면서 분별로, 저 악마 같은 놈 저놈이 나를 죽이려고 또 한 장을 했나. 내가 막 분노를 막 덮어씌워 가지고 온갖 생각 분별 망상을 덮씌워 가지고, 그 소리를 이미 지나간 소리 벌래 없잖아요. 근데 그걸 지금까지 쥐고 있는 거예요. 혼자 얘는 인연 따라 생겼다 인연 따라 사라지고 끝났는데, 이렇게 사실은 인연 따라 생기고 사라진 건 생기고 사라지고 그뿐이에요.
의미가 없어요 그냥 있는 그대로, 인연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고 그거예요. 그냥 연생 인연, 멸인연 따라 생겨나고 인연 따라 사라지는 거에는 의미가 없어요. 인연 따라 생기고 인연 따라 사라질 뿐이에요. 그냥 그건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에요. 그냥 생기었다 사라졌다 그뿐 그래서 그걸 깨닫는 걸 열해 여라 그래요.
인연 따라와도 여하고 인연 따라가도 여하단 말이에요. 와도 집착하지 않고 과도 집착하지 않으니까 거 실제가 아닌 줄 아니까 연기법을 깨달았으니까. 인연 따라 연 연하여 일어났구나 연하여 생겨났다는 게 연기 아아 그러니까 인연 따라 연하여 생겼으니까. 인연 인연이 다 하면 사라지겠구나. 그 인년 따라 생기고 인년 따라 사라진 게 뭔 의미가 있겠어요.
그게 의미를 지니는 건 사람의 분별에서 나오죠. 그러니까 세상 이게 지금 제가 몇 가지 비유를 들어 그러는데, 세상 전부가 연생 인연이죠. 이 세상에 인연 따라 생기지 않은 게 있습니까. 인연 따라 멸하지 않는 게 있습니까.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물질적인, 정신적인 모든 것들은 전부 다 연생 인연 별이 아아, 즙이 세상에 있다고 여기는 이 태어났고 생겨나고 사라지는 생겨난 모든 것들은 전부 다 연생 이연 별이지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는 사람이 부여했어요. 아, 스님, 우리 부모님이 나를 태어나게 해 줬으니까, 부모님이 나에게는 자식에게 부모님이 의미가 있죠. 진짜 인가요? 그 사람에게 나오지 않나요? 그 사실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사람 머릿속에서 나오지 않나요? 내가 내 배 아파서 난 자식인데, 그 자식을 미워하는 부모도 있을 수 있어요.
심지어 옛날에 임금들 되려고 서로 죽이기도 해요. 옛날 뭐, 이런 얘기들은 적 있는 거 같아. 옛날 어느 사회에서는 그냥 집단 뭐, 부부라는 이런 게 자체가 아예 없었다는 거죠. 그런 개념 자체가 집단적으로 살았다는 거죠. 그 누 자식도 집단적으로 키웠다는 거죠. 연세 드신 분들, 어르신들의 지혜가 있는 분들이 자식들을 그냥 키우고, 젊은 사람들은 나가서 일하고 먹을 거 해오고, 원시 사회에서 그런 적도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거 같아요.
그러면 태어났는데 누구였는지 모를 수도 있단 말이에요. 그냥 자연스럽게 눈 맞으면 뭐 사랑을 나누고, 이럴 테면 몽골 같은 경우는 그랬다죠. 그 이제 초원을 옮겨 다니는 자기네들 가족, 친지, 부족들 그리 다니니까 부족 안에서만 자꾸 이렇게 혼인을 하는데 부족 안에서만 혼인을 하면 자식이 약간 기형이 나온다든지 막 이럴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자기 남편 뭐, 하고 이렇게 사랑을 나눌 수가 없었고 자식을 가 없었고 오히려 외부에서 손님이 오면, 손님이 오면 이제 그 사람이 자식을 낳게 해 주는 거죠 뭐 그랬다는 거예요,
근데 그게 이상한 게 아니었다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집단적으로 어떤 하나의 개념을 만들어 놓고 어떤 어떤 제도를 만들어 놓고 그걸 우리 모두가 믿기 시작한 거죠. 어느 날부턴가 그러면 그게 진리인 것처럼, 그게 절대 진실인 것처럼 모두가 함께 믿기로 작정한 거예요.
그냥 지금 이런 말이 어찌 보면 좀 위험하게 들릴 수 있지만, 진실을 는 그대로 통찰해 보면 그렇지 않나요.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는 나쁜 거라고 여겨지는 민속 풍속 같은 것들이 다른 나라에 좋은 걸 수도 있거든요. 우리나라에서는 뭐뭐 그런 일 있으면 재수 없다 그러는데, 다른 나라에 그런 일 있으면 재수 있다 이럴 수도 있어요. 우리 나는 양말 신고 법당에 들어오는 게 예의인데, 남방불교 갔다 제가 양말 신고 들어갔다가 좀 맨발로 법당 들어가는 게 예의라고 뭐 뭐든지 다를 수 있거든요. 그 정해진 게 아무것도 없어요.
자아성장과 타인비교
왜 그 정하는 것들은 사람 머릿속에서 나오기 때문에 문화, 풍습, 뭐 옳고 그럼이 모든 것들이 사람이 만들어 놓은 거잖아요. 본래에는 그런 게 없잖아요. 그냥 이년 따라 생기고 사라지고 그뿐이지 뿐이라니까. 사람이 태어나는 건 좋은 일이고, 죽는 건 서글픈 일일까요, 그 사람 생각이에요.
장자는 뭐 아내가 죽었을 때 표주박을 두드리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쳤다 그랬죠. 어디서 오고 어디서 가는지 아는 사람은 그렇게 서할 일이 없을 없다는 걸 알 수 있단 말이죠. 그럼 죽음이라는 게 음습하고 암담하고 괴로운 거야라는 거 실패라는 거 생각이 만들어낸 분별이 그 생각이 없으면 사실은 눈이 부처님 가르침에 입각한 진리에 의하면이 반야심경의 반야 지혜에 의하면 불생불별이라고 이미 공부했지아요.
본래 생이 없고 멸이 없어요, 태어나는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어요. 그게 다 자기 생각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생사를 비롯한 일체 삼남, 한상 모든 것들을 전부 다 자기가 생각으로 만들었잖아요. 생각으로 만들어 놓고 내가 만든 생각에 기해 가지고, 이 생각이 올라와 왜 그게 가능할까요? 이 세상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허망한 거라는 거를 알면 즐기지 않겠죠? 실제가 아니라 실체라는 착각을 하지 않겠죠.
무도에 집착할 필요가 없음을 알겠죠. 인연 따라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건데 뭘 집착할 게 있겠어요? 뻔하게 헤어질 건데 그죠. 뻔하게 멀어질 거잖아요. 우리는, 아, 사랑하던 사람과도 반드시 헤어질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연생 이연별이라는 연기법의 진실을 깨닫게 된다면 공성을 자각하기 때문에, 여서 말하듯이 무자성, 무집착, 무소득을 깨닫기 때문에 즐기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실제화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인연 따라 생기고 사라질 뿐이니까 실체라고 해서 붙잡지 않아요. 근데 실체라고 여기면 인연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들이 실체야. 나도 실체고 세상도 실체야.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나라는 실체가 세상에 있어야 돼요. 내 자식, 내 가족, 내 거세라는 걸 취하는 일이 아주 심각한 일이 돼 버려요.
실체가 가졌을 때 기쁘다는 느낌도 실체고, 행복하다는 것도 실체고, 부자라는 것도 실체라고 느끼니까, 그러니까 그 실체가 어디서 나온 실체예요? 자기 생각에서 나온 실체일 뿐이죠. 사실은 전혀 실체일 수가 없는데, 인연 따라 생기고 사라지는 건데 내가 동등 인연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평등해, 동등해. 대평, 정말 동등해, 똑같은 부처 든요.
그런데 사람은 거기에다가 이름과 개념을. 부여하고 의미를 부여해서 이건 좋고 저건 나빠. 이건 옳고 저건 틀렸어. 이건 귀하고 저건 천해. 이런 식으로 분별을 개입시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인생에서 이렇게 분별을 믿기 시작하면, 그니까, 실제화하니까 분별을 하는 거고, 그 분별을 믿기 시작하면 내 인생이 심해져요.
의미 있는 건 어떻게든 가져야 되고, 좋은 건 어떻게든 가져야 되고, 어떻게든 부자가 돼야 되고, 어떻게든 옳은 건 해야 되고, 틀린 건 하면 안 되고, 싫은 건 밀쳐 내야 되고, 미워하는 건 없애 버려야 되고, 나쁜 거는 거리를 둬야 되고, 그런 식으로 좋은 거는 취하고, 싫은 건 버려야 된다라는 이런 망상이 환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진실을 깨닫고 난다면 모든 것이 이 모양은 다르지만 이건 인연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모양일 뿐이지. 모양이 드러나고 있는 이게 일어나고 있는 이 바탕은 모든 게 그대로 모양이 있는데 없어요. 이렇게 투명하게 뚜렷하게 다 있는데 없어요. 없어서 없는 게 아니라 인연 따라 생겨나고 사라진 건 전부 다 있습니다.
다 있어요, 다 있는데 이게 진실에서 있지 않아요. 머리로 계산해 가지고 따져 가지고 교리를 공부해서 아, 실제 있지 않는 거겠네. 이렇게 머리로 없는 게 아니에요. 약간 뭐랄까 이렇게 좀 체험적으로 가슴으로서 와가 되는 차원에서의 없음이요.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을 실제라고 여기는 그 아주 오래된 없습 고정된 어떤 그 집착 취하는 그것이 가벼워진다 말이죠. 그러니까 괴로움이 없죠. 내가 어떤 특정한 생각을 붙잡아서, 이 생각은 옳은 생각이야. 난 이렇게 행복해질 수 있어라고 믿기 시작하면, 그 생각을 죽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