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제가 늙고 병들고 죽는 문제에 대해서 해결하고 내가 늙는 거에 전혀 문제가 아니구나라고 병드는 것, 죽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구나, 늙고 병들고 죽는 일이 별로 없구나 해서 여기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길이 있고 그 길을 갈 수 있다고 한다면 남은 인생 뭐 하시겠어요? 여쭤봤더니, 남은 인생 우리는 할 게 없어요. 할 게 없어요.
미래적 관심사
우리는 돈 버는 것도 이제는 할 수도 없고 그냥 운동이나 좀 하고 몸관리나 좀 하고 사는 거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러다 보니까 외로운 거예요. 할 게 없으니까, 내 인생에 더 이상 할 게 없으니까 고독한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늙고 병들고 죽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전혀 두려워지지 않을 수 있다면 제 남은 인생 다 바쳐서 그 공부하죠. 남은 인생 완전히 거기만 헌신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얘기한단 말이에요.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 실제 이제 노부사님들이 이제 이 법문이 선 불교를 딱 접하고 나서 하시는 말씀들이 그거예요.
내가 70, 80 넘어가면서 세상에 이제 즐거운 것도 없고 남편도 죽고 자식들도 다 떠나가고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절에 가서 그냥 친구들 만나서 도반들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법문 듣고 오는 거, 그게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그렇게 살다 보니까 너무 외롭더라. 너무 공허하고 외로워서 정말 이게 인생인가 싶은 절망감이 들었다는 거죠. 사람들이 왜 고독사한다는 줄 알 것 같다는 거죠. 그러다가 이 공부를 딱 만나고서는 신심이 생긴 거예요. 아, 진짜였구나.
선사스님들이 이 법을 깨닫고 나면, 자기를 깨달으면 생로병사에서 벗어난다는 게 진짜일 수도 있겠구나. 그렇다면 내가 완전히 마음을 고쳐먹는 거예요. 80 넘은 노부사님들이 와서 눈빛이 초롱초롱하면서 그 얘기를 하시더라니까요. 스님, 제가 이제 삶에 에너지가 막 넘쳐납니다. 내가 죽기 전에 이 문제 한번 해결하고 가야 되겠습니다.
내가 죽고 사는 문제 이거 한번 해결하고 가야지.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이 생기고 나니까 인생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내가 젊었을 때라도 이게 제일 중요한 거였네요. 젊었을 때 이걸 하지 못한 게 아닙니다. 남은 인생 이렇게 같이 있는 공부가 어디 있겠습니까? 내 남은 인생 완전히 이 공부에다가 내가 매진하겠습니다. 그러면서 공부한다니까요.
그렇게 할 수 있는 공부가 바로 이 공부예요. 요즘에 저희 먹닭소리 유튜브 채널을 하다 보니까 그걸 보고 또 BTN 채널을 보고 TV를 보고 그러고서 오시는 분들이 더러 계시는데요. 되게 특이한 점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 20대, 30대 아들, 딸들이 엄마, 아빠를 끌고 오는 거예요. 절에 한번 가자. 엄마, 아빠도 절에 다 다니고 있지만 절에 한번 갑시다. 아들, 딸이 데리고 엄마, 아빠를 모시고. 와서는 저한테 저희 엄마, 아빠예요. 이러면서 소개를 시켜줘요. 제가 깜짝 놀란 점이 이렇게 젊은 친구들이 요즘에는 명상, 마음공부, 선불교 이런 거에 너무나도 관심이 많다는 것이 되게 놀랍더라고요. 이게 어떤 하나의 현상 같아요. 또 종교랑 상관없이 여기에 관심이 너무나도 지대해졌어요.
그 이유가 뭐겠어요? 그 이유가 사람들은 누구나 현실에서 아무리 현실에서 승승장구하고 아무리 잘 나가고 해도 그 끝에 결국에 우리가 가야 할 끝에서는 어떤 거라도 충족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아요. 우리 인생의 100년도 안 되는 인생 동안 해볼 거 다 해보는 거예요. 왜? 돈에 뭐가 있을 줄 알고 돈을 벌어보고 명예, 권력, 지위에 뭔가가 있을 줄 알고 벌어보고 뭐든지 막 다 해보는 거예요. 다 해봐서 그거에 성공한 사람조차 그 끝에 완전한 만족이 없구나.
늙고 병들고 죽음에서 오는 공허감, 그것에서 나는 벗어날 수 없구나. 절망한다니까요. 그래서 이제 일체의 고통과 액란에서 벗어난다고 했는데 뭐가 고통이고 뭐가 액란이냐. 부처님은 여러 가지로 고통을 정의하셨는데 이를테면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했어요. 세 가지의 괴로움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고고와 행고와 괴고다라고도 말씀하셨어요.
진정한 해방
고고라는 것은 괴로움의 괴로움이라는 뜻으로 인간의 어떤 감각적인 괴로움을 말하는데 그냥 이 나라는 육체가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느낄 수밖에 없는 괴로움. 몸이 아프거나 또는 배고프거나 누가 나를 때렸다거나 춥다거나 이런데서 오는 어쩔 수 없는 괴로움. 그게 이제 고고고요.
행고는 변하기 때문에 오는 괴로움. 젊지만 늙음으로 변해가잖아요. 늙기 싫은데 늙어가야 되는 데서 오는 괴로움, 건강하다가 아파야 되는 데서 오는 괴로움, 돈이 많았다가 가난해지는 데서 오는 괴로움, 내가 칭찬받았다가 비난받을 수밖에 없는 데서 오는 괴로움, 자아가 확장이 되다가 자아가 축소되는 데서 오는 괴로움. 삶은 이렇게 계속해서 변한단 말이에요. 이 변화에서 오는 괴로움들이 있단 말이죠. 변하기 싫은 거예요.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변하기 싫단 말이잖아요. 변한단 말이에요. 사랑은 변해요. 모든 게 변한단 말이에요. 마음도 변하고. 변한 데서 오는 괴로움이 있어요. 또 세 번째로 무너지는 데서 오는 괴로움. 괴고라고 해서 무너지는 데서 오는 괴로움. 죽음. 몸이 무너지거나 재물 지위, 명예 권력 이것도 무너지기도 하잖아요. 서서히 변해가기도 하지만. 어느 날 탁 무너지기도 해요.
제가 요즘 보니까 이제 그 우리 마음 공부하고 불교 공부하는 사람들이 아직까지는 5,60대 분들이 제일 많거든요. 불교 공부하는 사람들이 아직까지 5,60대 분들이 제일 많은데 그 5,60대 분들의 제일 이 공부 많이 하는 사람들 그분들의 단면 한 문제가 뭔가 봤더니 50대 중반쯤이 되면 누구나 퇴직을 해야 되는 거예요. 50대 초반, 중반 이때 퇴직을 하는 거야. 빠르면 40대 중후반. 그러니까 이 거사님들 같으면 그 퇴직에서 오는 두려움. 어떻게 살지? 어떻게 살아야 되지? 막연한 두려움..
이게 요즘에 점점 젊어지고 있어요. 30대, 40대부터 이런 어떤 제2의 직장, 제3의 직장. 옛날 같다. 평생 직장이 없어요 이제. 제2, 제3, 제4의 인생을 계속 살아야 돼요.
내가 잘 살 수 있을까? 막연한 두려움. 무너지는 데서 오는 괴로움들. 근본적인 두려움이 있단 말이에요.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는 항상 불안해요. 잘 나가는 사람은 두렵지 않을 것 같죠? 잘 나가는 사람도 똑같아요. 똑같이 두려워요. 오히려 별로 없는 사람은 덜 괴롭죠. 없어질 것도 없으니까. 근데 가진 게 많은 사람은 잃을 게 많아서 더 크게 괴롭죠. 잃을 게 많으니까. 그리고 또 이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괴로움을 4고, 8고라고 해서 이 8가지 괴로움을 말씀하셨어요. 4고, 8고라고 한 이유는 그 8가지 괴로움 가운데 핵심적인 것을 4가지로만 추리면 4고라는 거예요.
그게 생로병사에서 오는 괴로움이에요. 태어남, 늙고 병들고 죽음. 이게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괴로움이잖아요. 누구나 100% 누구나 다 와야 되는 괴로움. 젊은 사람들은 아직 내가 늙고 병들고 죽겠나, 설마.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내가 설마 늙겠어? 내가 설마 병들겠어?
내가 죽으려면 천 년, 만 년 남은 것 같아요. 이제 세상 시작한 것 같아요. 그런 느낌을 오래 받았단 말이에요. 근데 어찌 보니까 그런 것 같아요. 한 40대? 30대 중반부터 40대까지는 그걸 경험하는 것 같아요. 뭐지? 난 아직 마음은 20대 같거든요. 그 친구들이. 마음은 20대 같은데, 10대, 20대 같은데 내가 30, 40대가 되니까 회사에서 대리, 과장, 부장, 팀장 맡으면서 갑자기 나는 저 밑에 있는 사람일 것 같은데, 왠지. 내가 갑자기 저 윗사람이 돼버린 것에 대한 약간 혼란? 이게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내가 이렇게 어른인가, 이제? 이게 또 약간 혼란스러움이 느껴지기도 해요.
그러면서 내가 나이가 들고 있는 나 봐. 이런 어떤 거, 거기서 또 넘어가버리면 야, 이것도 끝나는구나 하는 불안감. 누구나 그런 게 있어요. 누구나, 신기하게도 20대는, 30대, 40대를 보면서 되게 부러워해요. 와, 안정감 있는 것 같고 뭔가 돈도 많은 것 같고 차도 있는 것 같고 저 높으신 분이고 진급도 했고. 와 정말 부럽다 이래요.
30, 40대는, 밑으로는 20대를 부러워해요. 정말 젊고 저때가 좋았지 저렇게 젊고 건강하고 와 나도 저때로 돌아가고 싶어. 이러다가 또 위로 보면 50대 분들을 보면 와, 저분들은 저렇게 성공을 했구나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그래서 20대가 되고 싶거나 50대가 되고 싶어 해요. 50대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남들의 칭찬 맞는 자리에 올라가서 남들의 부러움을 사지만, 그분들은 속마음은 그게 아니에요.
인생 모험
제가, 와 대단하시네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오셨어요 하면 대부분 뭐라는지 아세요? 에이, 스님, 이거 곧 끝난다는 얘기에요. 이 말은 곧, 이건 이제 끝날 때가 머지않았다는 소리예요. 높은 자리에 있어서 화려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분들은 이제 곧 끝나겠구나 그걸 두려워해요. 그러면서 이제 한창 시작할 20대, 30대, 40대를 부러워한다니까요.
자기 자리를 만족하는 사람이 없어요. 항상 누군가가 부러운 거예요. 딴 나이 때가 부러운 거예요. 그러니까 그 말은 뭐겠어요? 우리는 지금 여기를 살지 못해요. 평생 살면서도 남의 인생만 기웃거리느라고 과거나 미래를 기웃거리느라고 진짜 눈앞에 삶을 살지 못해요. 자꾸 죽이고 있는 거예요, 남들의 인생을 기웃거리느라고, 생각 속을 살느라고, 기대나 바람, 그거를 추구하느라고. 지금 눈앞에 지금을 즐기지 못하는 거예요, 만끽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걸 삶을 죽이고 있다고 표현해요. 생각 속에서 만든 가상현실 추구하는 그 마음, 거기 속에 살아가느라고 진짜 지금을 죽여버려요.
그래서 고사님들 40대, 50대 된 고사님들이 그런 얘기 많이 하세요. 괴롭다 왜 괴롭냐고 하니까? 집에서 왕따래요. 왜 집에서 왕따세요? 고사님이 돈 벌어가지고 자식들, 보살님 다 키웠는데 왜 고사님 왕따가 되셨어요? 이래 물어보면 그죠, 스님? 이러면서 위로를 받으시셔요. 그럼요, 그럼요. 얼마나 열심히 사셔가지고 자식들, 보살님 키워주셨는데 그러면 안 되죠. 이러면 신이 나서 얘기를 하세요.
얘기가 레파토리가 똑같아요. 나는 가족에 대한 헌신의 마음으로 오로지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족을 진정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가 돈을 벌어서 대줘야만 얘네가 살 수 있다. 이게 남편들은 그게 너무 큰 거예요. 스트레스가, 이걸 내가 지켜야 된다라는 무게감이 너무 큰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 때문에 그거를 하려면 지금 너희들하고 노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보살님 하고 지금 재밌게 놀고 집안일 도와주고 이게 중요한 게 아니야. 이거 하려면 내가 돈을 벌어와야 이게 가능한 거야 라는 게 있는 거예요.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제 집안일은 내팽개치고 자식하고 놀러 가는 건 내팽개치고 밖에 나가서 일만 하는 거죠. 그게 가족을 위한 사랑으로 그랬단 말이에요.
의도는 그랬는데 막상 자식들이나 보살님은 내가 정말 필요할 때 있었어? 아이들이 정말 힘들 때 정말 아빠가 필요할 때 있었어? 그렇게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아버지 입장에서는 억울한 거예요. 내 인생 자기네들. 위해서 바쳤더니 난 이제 왕따가 됐구나. 지금이라도 지금이라도 괜히 훅 다가가려면 안 맞잖아요. 좀 옛날에 진짜 그러지, 이럴 거 아니에요. 욕먹는단 말이에요.
지금이라도 따뜻하게 다가가면 되겠죠? 즉, 그래서 그게 틀렸단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더 중요한 건 뭐겠어요? 눈앞에 지금을 살아야 돼. 지금을 제일 필요할 때 그 앞에 있어주는 게 중요한 거예요. 말 한마디라도, 지금을 내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살아야 되잖아요.
근데 열심히 일하는 분들은 뭘 위해서 사는지 아세요? 미래에, 지금 열심히 하지 않으면 노후가 보장되지 않아요. 노후를 위해서 살아요. 안정된 노후를 위해서. 이 젊은 누리고 느끼고 만끽할 수 있는 이 젊음을 희생시켜요. 충분한 노후를 위해서 실제 생각해보세요. 우리의 목표가 그렇게, 나이 든 할아버지가 우리의 목표였나요?
나이 든 돈 많은 할아버지가 우리의 목표입니까? 아니잖아요. 사실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거를 목표인 줄 착각하면서 산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목표 때문에 지금을 희생시켜요. 지금 살아있지 못해요. 지금 깨어있지 못해요. 지금 느끼고 누리고 만끽하지 못하고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생생한 현실을 살지 못해요.
지금이라는 걸 없애버려요. 이 지금이라는 이 통으로 이 전체가 바로 진짜 자기예요, 본래면목이에요. 지금을 사는 게 과거나 미래가 바로 분별심이에요 생각이에요. 과거는 한 생각, 이렇게 해야지만, 과거가 일어나잖아요. 과거나 미래는 그게 실제가 아니에요. 한 번도 태어나서 한 번도 과거로 살아본 적이 없고, 한 번도 미래를 1초도 살아본 적이 없어요. 눈앞에 현실만 살아볼 수 있어요. 그러니까 과거나 미래는 다 분별심이라는 소리예요.
불안과 괴로움
그 말은 곧 내가 태어났어, 과거에 태어났어 하는 거잖아요. 여러분, 스스로 자기 태어난 거 본 적 있습니까? 나는 태어나서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잖아요. 그거 과거 아닙니까? 태어난 어느 시점은 과거잖아요. 과거에 한 번도 안 가봤잖아요. 과거는 생각을 일으켜야지만 있는 거잖아요.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면 과거가 없어요. 그리고 내가 명백한 내 인생으로 증명할 수 있잖아요.
과거를 1초도 살아보지 않았다라는 게 증명되잖아요. 내가 증명한 거잖아요. 여러분, 여러분 인생에 증명되지 않아요? 과거가 없다는 게 증명되고 있잖아요. 왜? 한 번도 안 살아봤으니까. 과거를 살았을 때는 그때가 현재였죠. 과거는 없어요. 그 말은 뭐겠어요? 태어남이 없습니다. 태어난 적이 없어요.
그런데 태어남이 있다라는 착각, 망상, 분별심을 가지게 되면. 내가 태어난 줄 알아요? 태어났다는 험한 망상을 주게 되면. 인체 연이어서 어떤 일이 생겨요? 노병사라는 괴로움이 따라와요. 태어났다는 망상이 늙는다라는 망상, 병든다라는 망상, 죽는다라는 허망한 망상을 연이어 가져오는 거예요.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허망한 망상이에요.
실제, 지금 여기서 눈앞에서 지금으로 돌아오면. 지금, 눈앞으로 돌아오면, 여러분은 늙었습니까? 젊었습니까? 늙음이 어떻게 경험되죠? 실제 늙음이 경험됩니까? 지금, 여기서 매 순간 늙음이 경험되나요? 내가 늙음이 경험된다고 할 때는 한 생각 일어나야지만 경험이 돼요. 한 생각 일어나서 아, 나 지금 몇 살이지? 어떨 땐 나이도 있잖아요. 내가 벌써 그 나이인가? 깜짝 놀라잖아요.
한 생각 일으켜서 그 나이를 떠올려야, 아, 내가 늙었구나. 이게 경험이 돼요. 연세 드신 분들도 젊은 연예인들 보면. 괜히 설렌다 그래요, 내가 나쁜 놈이라서 설레는 게 아니에요. 내 마음의 한 구석에는 나이 들지 않은 어떤 부분이 있단 말이에요. 진짜 자기는 나이 들 수가 없어요. 나이는 생각이에요. 생각을 일으켜야 내가 몇 살이지가 나타나요? 지금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어요,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고 무심하게 가만히 있어요.
그러면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면 거기에 나이가 있습니까? 거기가 성별이 있습니까? 피부색이 있습니까? 어디 산다는 게 있습니까? 한 생각 일으키지 않으면 내가 어디 산다는 것도 없어요. 공간이 있습니까? 내가 인도에서 제가 인도에 어느 골방에 앉아 가지고 이렇게 명상하고 있는데 거기 인도가 아니더라고요. 인도인지 나중에 알았어요. 공간이 없더라고요. 시간이 있습니까? 시간이 없어요. 시간과 공간은 환상이에요 망상이에요. 자기 한 생각이 일으키는 거예요.
실제가 아닌 건 다 걷어내 보란 말이에요. 걷어내 보란 말이죠. 그러면 생이 없어요. 그러니까 늙고 병들고 죽는 게 없습니다. 늙는다는 생각 있을 뿐이고 병든다는 생각 있을 뿐이고 죽는다는 생각 있을 뿐이에요.
실제 경험하는 건 늙음을 경험하는 게 아니라 실제 경험할 땐 어떻게 경험되나? 5분 18개로 경험돼요. 5분 18개는 뭐냐면 느낌으로, 감각으로 보는 경험, 듣는 경험, 냄새 맡는 경험, 맛보는 경험, 감촉 느끼는 경험, 생각하는 경험, 지각과 감각 같은 지각, 감각, 촉각, 생각, 이런 걸로 경험되거든요. 실제 경험은 그걸 5분 18개라고 불러요.
눈 깊고 혐음뜻이 색상의 미촉법을 접촉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 세상의 일체가 뭐냐 12차가 일체라고 했어요. 눈 깊고 현음뜻과 색상의 미촉법이 접촉하는가? 이게 전부 란 말이에요, 세상의 전부. 근데 그게 진짜 실제 하는 거냐는 말이에요. 실제 하는 건 내가 있고, 내 바깥의 경계가 실제 하는 게 아니라 나라는 걸 어떻게 경험할 수 있죠? 진짜 내가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정말 경험하는 건 뭐예요?
보다는 자각, 느끼는 자각 이렇게 앉아 있으면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면 몸의 감각들, 어떤 지각들. 엉덩이가 약간 무게감이 느껴지거나 따뜻한 느낌이 느껴지거나 몸에서 느껴지는 이런 감각들, 이런 어떤 단순한 자극, 단순한 감각. 이런 것이 알아차려질 뿐이지. 여기서 내 몸이 자각되는 건 아니에요. 사실은 그건 생각이죠. 우리가 명상하라고 이렇게 앉아 있으라고 하면 사람들은 이미지를 가지고 내가 내 몸이 몇 살 된 남자인 내 몸이 참선을 하고 이렇게 앉아 있어 하는 이미지를 다 그려놔요.
근데 그 이미지, 그 생각, 그 생을 깨버리면, 생을 내려놓으면 실제 여기서 경험되는 건 뭘까요? 내가 경험되는 게 아니라 그냥 오고 가는 느낌들, 오고 가는 자극들, 오고 가는 소리들 오고 가는 생각들, 단순히 이런 경험들이 그냥 일어났다 꺼지고 일어났다 꺼지고 일어났다 꺼지잖아요.
그냥 어딘지 명확하게 모르겠어요. 어딘지 모르겠는데 이 밑에 어딘가 부분에서, 밑이라는 것도 분별이고 텅 빈 어딘가에서, 그냥 다리가 아프다 이러면 명상하고 있다가 그냥 어떤 다리가 아프다는 생각이잖아요. 실제 경험되는 건 여기 어디에서 어떤 자극, 그걸 어떤 것이다라고 해서 분별하지 않으면 어떤 경험이 일어나고 있어요.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그걸 내가 알아차리고 그걸 내가 비추고 있단 말이에요. 그걸 비추고 있는 이것만이 진짜예요.
그 경험은 그냥 계속해서 이렇게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하고 있단 말이에요. 오고 가고 오고 가고 하는 그런 허망한 자극들, 그것만이 그냥 이렇게 감각지각되고 있어요. 5월 18기가 그냥 이렇게 지각된단 말이에요. 실제 내가 지각되는 게 아니고 나다라고 하는 건 생각이 만든 거잖아요.
지금 여기서 실제 자기 경험으로 한번 들어가 보란 말이죠. 실제 자기 경험으로 들어가면 거기 내가 있느냐 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면, 분별을 일으키지 않으면 거기 어떻게 내가 있어요, 내가 경험되지 않아요. 사실은 그냥 알아차림, 이게 경험돼요. 듣는 알아차림, 몸의 감각을 알아차림. 생각을 알아차림. 근데 생각도 왔다 가는 거니까 진짜가 아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