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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말 사용의 중요성 3편

그러니까 말에 끌려다니는 노예처럼 주변 상황, 경계에 끌려다니는 존재로 휘둘리는 존재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첫 번째 자리에 늘 그대로 있으시면 됩니다. 아까 이제 종을 쳤는데 이게 들려오는 이 첫 번째 자리. 이게 분별은 다 다르죠 그죠.

 

말의 첫 번째 자리

사람마다 어떤 사람은 이 울음소리 듣기 좋다 어떤 사람은 듣기 싫다 어떤 사람은 뭐 뭐 어떤 교회 종소리 같다 뭐 이럴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뭐 다양하게 분별은 다른데 저를 바라보고 여러분들이 제가 하는 말을 듣고 판단은 다를 거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듣기 좋다, 듣기 싫다, 이해가 된다, 이해가 안 된다, 목소리가 어떻다 저었다 분별은 다 다를 거 아니겠어요.

 

그러면 이 법이라는 건 다른 게 법이겠죠. 부처님이라는 말이 부처님이라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되게 따뜻하고 장엄하고 아름답고 좋은 느낌으로 닿겠지. 어떤 사람은 되게 싫어하는 말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말일 수도 있겠죠. 그렇게 그 말의 뜻을 따라가면 사람 다 다르잖아요. 사람마다 다 다른 건 법이 아니죠. 법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되기 이전에, 즉 여러분이 지금 막 갓난 내기로 막 태어났다고 생각해 보세요. 말의 뜻을 전혀 모른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이 소리가 안 들리나요? 그래도 이 소리는 듣죠. 고양이나 강아지도 이 소리를 듣죠. 그렇죠 이 소리를 들어요.

 

그럼 보세요 이거 해석하기 이전에 판단하고 분별하고 의미를 부여하기 이전에 그냥 이거 이거는 모두가 똑같지 않나요? 여기에 대한 생각, 해석, 판단을 따라가서 두 번째 자리 떨어지면 두 번째 세 번째 화살을 맞으면 다 다르지만 어떤 사람은 이 소리를 듣고 좋다, 어떤 사람 싫다 하지만 그 두 번째 자리 떨어지지 않고 그냥 첫 번째 자리에서 그냥 이거를 석가 부처님께서는 볼 때는 보는 것만 있게 하라들을 때는 듣는 것만 있게 하라들을 땐 들을 뿐, 볼 땐 볼뿐 이랬단 말이야.

 

이뿐의 자리 첫 번째 자리에 있을 때는 그냥 이 소리가 이게 진실이에요. 이게 법이란 말이에요.. 여러분이 지금까지 지옥 갔다 극락 갔다 하면서 남들이 나에게 하는 말에 휘둘리며, 이게 바로 법이다, 이게 바로 우리의 본래 목이다, 이게 진짜 자기다 이렇게 얘기를 하면 저게 뭔 소리지? 이게 왜 법일까? 이게 왜? 그렇게 머리 필요 없이 너무나도 그냥 사실이 뭐냐. 이게 팩트 체크를 해 보자는 거예요.

 

진실을 한 번 보자. 말의 의미를 따라가면 다 다르잖아요. 그럼 우리는 말의 의미를 따라가느라고 지금까지 지옥 갔다 극락 갔다 하면서 남들이 나에게 하는 말에 휘둘리며 살았잖아요. 남들이 나에게 내리는 판단 평가에 휘둘리면서 지옥 갔다 극락 갔다면 살았는데, 앞으로 남은 인생도 그러고 살 거거든요.

 

그 얼마나 이 자기가 주인이 아닌 인생이잖아요. 말에 끄물려 다니는 인생이잖아요. 그럼, 이 첫 번째 자리를 확인하고 난다면 첫 번째 말에 말이 휘둘리기 이전 말이 나온 그 당처 삼계 유심의 자리. 그 여예한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여기 있게 된다면, 이게 바로 바른 마음, 바른말을 할 수 있는 거예요.

 

이렇게 됐을 때 말을 하지만 말에 걸리지 않아야 이제 마음껏 말을 할 수도 있고 말을 들을 수도 있는데, 거기에 내가 막 휘둘리는 일은 없단 말이죠. 그게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거예요. 말의 의미에서 좋은 말, 싫은 말을 극단으로 몰아가서 싫은 말은 극단적으로 괴로워하고 좋은 말은 극단적으로 더 듣고 싶어 욕망하는 그런 양극단의 치우친 삶을 사는 게 아니라, 듣기 싫어 죽겠는 말해도 크게 반응하지 않고 그냥 들을 뿐. 듣기 좋은 말도 과도하게 욕하면서 더 듣고 싶어 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을 말할 뿐이 되고, 그래서 말을 하되, 자취가 없는 말이 돼버려요.

 

말의 습관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평생 법을 하셨는데, 한마디도 말한 바가 없다. 하대함이 없이 했을 때는 아무리 많이 떠들어도, 그게 바로 건이에요. 말을 하지 않아서 건이 아니라 어. 그래서 우리가 이 현실적으로 이 아까 우리가 봤듯이, 말이라는 게 사실은 힘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건 힘을 지는 것처럼 느껴져요.

 

현실에서는 그런 어떤 우리 중생들에게는 엄청난 힘을 가진다는 말이죠. 여러분, 그건 바른 말이라고 했는데, 바르다고 했는데, 바르다는 건 연기법이란 했고요, 연기법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고 했어요. 이것과 저것은 둘이 아니다는 이것이 뭐라면 저것이 별하는 관계, 둘이 아닌 관계, 불법을 하라는 거거든요.

 

내가 우리가 상대방에게 자기가 말하는 습관, 있잖아요. 자기 말하는 습관. 불교의 수행은 뭐가 수행이냐면. 보시 에어, 이행 동사라고 부르거든요. 에어, 사랑스러운 말을 한다. 그래요. 사랑스러운 말을 한다. 그래요. 보살은 왜 바른 말을 하니까, 그 사랑스러운 말을 왜 하는가. 그리고 이 사랑스러운 말을 하는 게 왜 중요한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려면, 그 사람의 말의 습관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좀 나오거든요.

 

우리는 내가 상대방에게 말을 거칠게 하는 사람 있잖아요. 막 욕을 한다든지, 나쁜 말을 한다든지. 이간질하는 말을 한다든지.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 이게, 저도 옛날에, 옛날에 이제 뭐, 뉴에이지든지 온갖 막 뭐 이런 사람들이 하는 책들을 더러 읽어 봤었어요. 아, 그때 뭐라고 쓰여 있느냐면 이런 말이 이써 있어요. 내가 상대방에게 하는, 행하는 말은 내가 나 자신에게 하는 말과 다르지 않다.

 

상대방에게 말하는 게 나에게 하는 말과 똑같다. 이런 소리가 있어서 '어, 이거 좋은 말이네' 하고 이 밑을 쫙 끄면서 '아, 멋있는 말' 이렇게만 생각을 했어요. 이게 그냥 단순히 멋있는 말이 아니더라고요. 나와 너가 둘로 나뉘어 있다고 여기잖아. 우리는 중생의 분별심에서 나가 있고 네가 있어요.

 

그런데 사실은 이 법 하나뿐이에요. 말하자면 이 법 하나뿐이에요. 불법이에요. 나와 너가 따로 없어요. 정말 네가 나고, 내가 나거든요.. 여기 있는 모든 존재가 우리가 자기 분별을 써서 제 말을 듣고 있지만 분별심을 써서 제 말을 듣는 차원에서는 자기 생각을 가지고 말을 를 들으니까 다 다르게 듣겠죠, 그죠?

 

그런데 사실은 이 첫 번째 자리에서는 마음 하나, 법 하나, 이 부처 하나가, 이 부처의 마음 하나 하나를 셰어 해 가지고 우리 모두가 이 첫 번째 자리를 활용하고 있다니까요. 우리 모두가 이 하나를 쓰고 있는 거예요. 이 하나 마음 하나가 이 마음 하나 써서 제가 말을 하고 있고 여러분이 이 말을 듣고 있어요. 전혀 다르지 않아요.

 

진에서는 아까 분별하는 건 다 다르다 그랬잖아요? 거짓이라 그랬잖아요. 팩트가 아니라 그랬잖아요. 이 첫 번째 자리만 진실이거나 나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소리가 '내가 저 소리를 듣는다'라고 생각하지만 그 생각을 내려놓으면 정말 '내가 저 소리를 듣는'이 소리가입니까? 내가 있고, 저 소리가 있어서 '내가 저 소리를 듣고 있어'가 진짜 경험될 그 생각을 내려놓으면 사실은 이 하나죠. 이게 여기서 들리고 그쪽에선 '들는다' 그건 생각이고 그 생각과 분별을 내려놓으면 '들는' 내가 없으면 '들리는 소리'가 없고, '들리는 소리'가 없으면 '들리는' 내가 없거든요. 불이법 이거든요.

 

인연으로 만들어지는 말

이게 교리적인게 아니라 정말 하나잖아요. 그러기 때문에 내가 상대방에게 하는 말은 100% 내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입니다. 내가 막 화가 나서 남들에게 막 못 할 말, 할 말 막 다 쏟아붓는 사람 있잖아요? 그거는 상대도 괴롭히지만 반드시 나를 괴롭히는 거예요. 그게 100% 자기 얘기하는 말이에요.

 

나와 남이 진리에서 나와 남이 따로 없기 때문에 진리는 나와 남이 둘러 나뉘지 않아요. 그니까 내가 남들에게 따뜻하게 말하고 사랑스럽게 말하고 그들에 도움주는 말을 하고 '나는 말 푸는 말을 한다' 그것은 내가 나를 존중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남들을 무시하는 말을 하는 사람은 이 우주로부터 내가 무시당할 수밖에 없어요. 그게 인간 보거든요.

 

그게 끌어당김의 법칙이요. 상대방을 아주 무시하는 말을 한다, '내가 나를 무시하는' 거니까 그 사람은 어떤 인강을 받느냐? 우주 모든 존재로부터 내가 무시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끌어당기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죠. 그러니까 나와 세상과의 관계가 아니에요.

 

이 세상은 자기와 자기의 관계요. 오직 자기 하나뿐이니까. 이 마음 하나뿐이기 때문에 이 바른 안목을 갖추고 있다. 이 불법의 안목, 연기법의 안목을 갖추고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남들에게 막말을 할 수가 있겠어요? 어, 불교에서 이렇게 말하죠. 이 좋은 말이 이제 네 가지가 있어요.

 

망어 지지 않는 또 양설 불설, 불구 불기어 망령 어라고 해서 진실되지 못한 거짓된 말. 또 설이라고 해서 막 화합을 깨뜨리고 이간질시키는 말.라고 해서 욕설, 거친 말. 또 기여라고 해서 꾸며낸 말. 법지 못하고 쓸데없는 말들, 이런 말들을 우리는 이제 한 단 말이에요.

 

이런 말을 통해 상대방을 조정하려고 하고 말을 통해서 어떻게든 가드릴 무시하기도 하고 욕하기도 하잖아요. 근데 이런 말이 나오겠 말이에요. 너 내가 정말 도리 아니라는 이 불법의 안목을 갖추고 있다면 바른말이 나오지 않을까요? 저절로 유아 사랑하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요? 내가 나에게 욕할 필요 없듯이 자기가 자기에게 자비롭지 않은 말을 하지 않죠.

 

말이 나오는 게 정말 자기에게 하는 말과 다르지 않은 말이 나온다는 말이 저절로 자비로운 말이 나오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런 그를 나와 둘로 나누는 이런 어리석음에 기반한 말들. 상대를 한다든지 모욕한다. 이런 말을 전혀 할 수 없게 되는 게 바로 바른말이죠.

 

너 내가 둘이 아니다라는 관점에서 저절로 자비와 사랑에 가득한 말들을 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게 바로 이 바른말이라는 것이죠. 그러다 보면 우리가 이제 어떤 그 한쪽에 치우친 말도 하지 않게 되겠죠. 극단의 치우친 말. 말이 거칠게 나가거나 강당장 여기니까 세상이 진짜라고 여기고 네가 잘못한 게 진짜라고 여기고 실체적, 관념, 의미를 과도하게 부여하는 거죠. 그럴 때는 진짜인 줄 알아요. 실체인 줄 아는 말이죠.

 

그러니까 이게 세상이 실제인 줄 아니까 실제인 세상을 내가 가져야 돼. 이 일을 잘해야만 내가 인정받아. 이게 이제 이 일이 항상 잘해야 되는 사람이야. 그러면 남들을 표독스러운 눈동자로 남들을 쏴아 붙이면서 똑바로 하라고 잘하라고 막 그냥 내리누르고 강당장 되니까. 그런데 그 일을 진짜 실질적으로 성공해야 되는 걸까요? 알 수 없어요. 진실은 그게 실패하는 것이 그 사람을 오히려 더 살려주는 일일 수도 있어요.

 

알 수 없기 때문에 인연이라는 것은. 근데 본인은 그걸 실제와 삶을 실제화 시키고 세계를 실제화시키니까 나와 세계가 실제라고 여기고 내가 인정받고. 이런 게 실제라고 여기니까 자기가 생각했던 거 아까 말한 거 정사유 자기의 사유가 삿된 사유가 들어가 있으니까 삿된 말이 어오고 된 행동이 이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니까 이 실체적인 사고 방식, 공상적인 입각한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생겨나고 사라질 뿐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건 아무것도 없구나.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구나. 이게 좋은 건지 저게 좋은 건지 나는 알 수 없구나, 오직 모를 뿐. 하지만 그냥 현실에 내 맡기도 그냥 최선을 다할 뿐. 최선을 다하지만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지만, 과도하게 집착은 그런 어떤 안목을 갖추고 있으면 말이 된 말들 막 과도하게 막 그냥 상대방을 해치는 말들, 이런 말들이 나올 수가 없겠죠.

 

저절로 어떤 에라고 하듯이 사랑스러운 말들, 존중하는 말들 나와 다르지 않게 존중하는 말들. 그런 말들이 나오게 됩니다.